『옥랑사(玉嫏祠)』는 저항의 민족의식을 담고 있는 저자의 대표 역사소설 장편작품으로 주인공 하층민 장선용을 통해 당시 몰락한 계층의 이질적 사회 현실과 아픔, 비련적 삶의 질곡과 고비, 절규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그는 우리 과거의 역사적 시련을 신랄하고 고통스런 모습으로 대변하는 중추적 매개체로 민족적 저항의식, 이른바 일련의 시대적 고통의 극적 리얼리티로 형상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서평>
-본문 중에서
“아전의 자식이 글이 암만 들으니 아전질이나 해먹었지 별 조화 있소? 아전이란 건 원이나 양반의 밥 아니오? 우리 아버지를 보시오. 돈이나 있으면 돈으로 벼슬을 사 원도 되고 양반도 되고 한다지만 돈이 어데 있소? 또 돈이 있다 하드래두 돈으로 사서 구차하게 뼈다귀 없는 양반 되어가지고 소위 관(冠)쓴 도적 노릇 하기가 소원도 아니고…… 그저 마음 편케 땅이나 파먹지요.”
당초에 일본공사 미우라가 새로이 조선으로 부임을 하려면서 망명 가 있는 박영효더러 조선에 나가서 일을 상의할 만한 사람을 천거하여 달라고 하였더니, 박영효는 우범선을 천거하였다. 미우라는 부임하여 오던 날로 우범선을 불러 그의 의견을 물었다. 우번선은 첫날에 여우같은 민비를 죽여 없애지 않고는 조선 조정은 바로잡아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미우라는 처음에는 주저하였으나 필경 동의를 하였고 그래서 이번 변에 민비를 죽이겠다는 것은 미리서 정한 방침이었다. 민비의 얼굴을 익혀 아는 구연수(具然壽)와 또 일본 계집아이 하나를 일행 중에 데리고 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골은 전면이 훨씬 산기슭 높은 데까지도 솔이나 잡목이 있는 것이 없고, 고운 금잔디가 심어논 듯 퍼언히 깔려 있다. 골 한복판을 양편으로 가른 것처럼 작은 골짝이 패어 있다. 이 골짝을 따라 얼마쯤 올라 가느라면 바위틈에서 흐르는 옹달샘에 이르러 골짝은 끊겨버린다. 그 샘에서 왼편으로 십여 칸 떨어진 곳에 무덤이 위아래로 둘, 다시 샘에서 바른편으로 오륙 칸 비껴서 조그마한 사당이 한 채…… 바로 옥랑사(玉娘祠)로 옥랑이 시묘를 살다 세상을 떠난 그 묘막 자리였다.
* 채만식(蔡萬植)(1902~1950) 호 백릉(白陵)
전북 군산 출생
와세다 대학 영문과 중퇴
조선, 동아일보 ‘개벽’지 기자 역임
1924년 단편소설 세길로, 불효자식 조선문단 발표 등단
소설, 희곡, 평론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