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년 학생운동 전모』는 1945년《조선독립운동비사(朝鮮獨立運動秘史)》1집에 이어진 2집 초판본으로 1919(己未年)년 3·1 운동 학생들의 활동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기술한 책이다.
프랑스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한 독립청원서 전문과 3·1 운동 학생단의 활동,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기까지 학생들의 저항 및 숨 가쁜 여정, 계획, 운동의 역사 사건기록이 구체적으로 명기되어 있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서평>
-내용 중에서
3월 1일 이래 독립시위운동은 각지에서 봉기하였고, 특히 부인들의 활동이 많았다. 일본인의 공장은 전부 파괴되고 사람들의 교회나 학교도 모두 폐쇄되었다. 체포된 자는 3만2천 명, 부상자 10만 명, 그중에 노인 또는 부녀자가 있었다. 일본인은 잔학한 행동을 일삼았다. 이에 사람들 총회는 이 진상을 천하에 알렸다.
도쿄에서는 1919년 1월 초순을 기하여 열혈아 최팔용(崔八鏞) 등이 재일 유학생을 수급하여 도쿄시 신전구(神田區) 조선 기독교청년회에서 조선독립에 관한 논의를 거듭하고 경시청에 출두하여 독립의 의견을 진술하는 등 여러 가지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경성 각 학교 학생들의 사상은 점차 험악하게 되어 재 동경학생과 어울려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의논했는데, 이와 전후하여 천도교 교주 손병희와 그 당의 사람인 최린(崔璘), 권동진, 오세영은 일반 인심의 상태를 보고 최남선, 송진우와 상의하였다. 이에 평상시에 포장한 조선독립을 완수함은 다시없는 좋은 기회라 하여 다시 기독교 이승훈, 함태영, 박희도, 세브란스병원 사무원 이갑성 등은 조선독립을 꾀하였다.
김창원, 문일평, 신상보, 문성호, 조형균, 김극선, 백관정은 3월 1일, 손영희 씨 외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체포된 동지들의 의사를 계승하고 조선독립의 목적을 수행할 의사를 의논하였다.
1919년 3월 12일 각자는 경성부 서린동에 조선 요리점 영흥관에 모여 조선 13개도의 대표자의 각각 생각으로, 한편 조선 총독에게 ‘조선독립은 동포 2천만이 요구하는 바이다.
선포문이라 제목을 붙여 국민대회는 백성의 뜻에 따라 임시정부를 조직하였다. 국민대표자를 파리강화회의에 출석하기 위하여 위원을 보내고 조약법을 제정한 의미와 임시정부, 각 의원, 평정관(平政官), 강화회의 출석의원 등의 이름을 명기하여 독립의 뜻을 고취하여 왕조의 관아를 문란케 한 원고를 작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