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록(45일간의 기록)』은 조선의 문신 나만갑(羅萬甲)이 병자호란의 기록을 날짜별로 상세히 기록한 것이다. 인조(仁祖) 14년(1636) 12월 청 태종이 군사를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와 임금은 한 달여 남짓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여 궁지에 몰린 나머지, 결국 성에서 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임금에게 항복하고 삼배고두(三拜叩頭)하기까지 치욕의 역사적 비운 실화를 담고 있다.
대화체 서술방식으로 저자가 조정에서 자신이 몸소 보고 들은 내용과 심적 과정, 주·객관적인 내용들이 잘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 내용 중에서
“적의 병기가 향하는 곳은 한 군데도 막지 못하고 경계를 넘은 지 겨우 5~6일 만에 바로 서울을 빼앗겨 종묘사직은 몸을 피해 다른 곳으로 임금의 수레를 옮기니, 실로 원통하고 분합니다. 도원수(都元帥) 김자점은 명을 받들어 궁궐을 지키는 장수이면서 한 번도 싸우지 않고 달려와 궁궐이 함락된 곳을 보고하니 무능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15일 을유)
전날에 계속해서 중신들 일동이 회의에 배석하였다.
홍서봉이 “어제 통역에 이신검(李信儉), 증수(曾隨) 박노(朴魯)를 데리고 적 진영으로 갔습니다. 어젯밤에 이신검이 말하기를 정명수(鄭命壽)의 말과 얼굴빛을 살피니 화친을 거절할 의향은 없는 것 같고 희망이 없겠다고 하는데, 거기 대해서는 정유사변에도 유해(劉海)에게 뇌물을 보내면 생각 외로 속히 성립될 것입니다.”
임금이 “이신검의 하는 말도 일리가 있다.(13일 계축)
적군이 서문 밖에 와서 우리 사신의 재촉을 전한다고 하여 즉각적으로 사신 파견을 마련하였다.
최명길이 “지금 좌의정 홍서봉이 병으로 나오지 않았는데 어느 대신을 보내는 것이 좋습니까?”
임금이 “우의정을 보내는 것이 좋다. 좌의정이 나오지 않는다는 뜻은 말하지 않아도 잘 안다.
최명길이 “뇌물 조건은 임금의 지시에 따라 체신(體臣)과도 상의했는데, 용호(龍胡)와 마호(馬胡) 둘에게는 1만 냥, 그리고 이하 사람에겐 3천 냥을 보낼 것을 서면으로 게시함이 좋겠다고 합니다.”
임금이 “여러 가지의 일을 그렇게 함부로 해도 좋은가? 그들의 행위를 보아 조치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19일 기미)
지금 시국은 점점 절박하여 중신들은 모여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여 성을 나갈 일을 협의하였다.
윤방(尹昉) 이하의 보고서가 도착하였다. 그 보고는 강도(江都)(강화) 함락, 빈궁(嬪宮)과 두 임금이 붙잡혔다는 보고였다. 온 조정이 매우 놀라고 얼굴빛이 변하였다.
최명길이 “전날 적군의 말에 강화로 가서 치겠다고 하기에 설마 하고 믿지 않았는데 역시 진실이었던가.”(26일 병인)
최명길이 무신 이영달(李穎達)과 함께 국서를 받들고 척화 신하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 두 사람을 데리고 적 진영으로 갔다, 간(汗) 장수가 두 사람을 죄를 따져 물었는데, 침착하게 직설적으로 조금도 굽힘이 없이 말을 하지 않았다.
내일 성을 나갈 절차에 대하여 의논하였다.(29일 기사)
*나만갑(羅萬甲)(1592∼1642) 자 몽래(夢賚), 호 구포(鷗浦)
조선의 문신으로 광해군 5년(1613) 장원으로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며, 인목대비 유폐사건으로 벼슬길을 버렸다가 1623 인조반정으로 다시 벼슬길에 오른 후 대과에 합격하였다. 병조정랑, 홍문관수찬,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했고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보위하며 관향사(管餉使)(군량을 관리하는 관리)로 책임을 맡았다. 이후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억울한 죄로 남해로 유배되었고 영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좌의정으로 중직되었다.
현재 그의 신도비는 경기도 구리 사노동에 자리를 잡고 있다.(시도무형문화재 12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