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운동(三一運動)』은 「소년행」(1938)이후 발표한 두 번째 창작집으로 대표하는 것이다. 1947년 「삼일운동」(3막 8장)으로 구성된 희곡작품 이외에 6편을 싣고 있다. 본고는 1946년 신천지(新天地)에 연재되었으며 해방 이후 원고를 모아 창작집으로 「맥(麥)」과 「삼일운동(三一運動)」 2편을 발간하게 된 것이다.
「삼일운동」은 희곡작품으로 1931년 잡지 ‘조선지광(朝鮮之光)’에 처음 발표되었고 1930년 평양고무공장 노동자 총파업에 참여하여 선전 선동활동을 수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파업조정안(罷業調停案)」(그 당시 카프 작가 7인집에 수록)을 발표한 이후 두 번째의 희곡작품이다.
「삼일운동」은 ‘조선예술극장’을 위해 해방 후 처음의 조선연극동맹 삼일기념 캄파공연용으로 집필한 것이다. 일제 식민지하 우리 민족의 비극적 상황을 배경으로 굴절과 저항정신을 둘러싼 수난과 비극, 각성을 통해 일제에 항거하는 강렬한 민족정신 의지와 인간의 아픔을 묘사하고 있다.
작품은 원본 그대로 전부를 실었고 대화나 구어, 방어 독특한 어휘 등은 원본에 충실하도록 하였다. 한문은 한글과 함께 병용하였다.
<서평>
「삼일운동」‘헌사(獻辭)’ 본문 중에서
이 한편을 3·1운동에 희생된 선열의 무덤 앞에 드리나이다.
내가 태극기를 우러러 처음 보기는 1919년 기미년 3월 1일 보통학교 1학년 나이 아홉 살 때였다. 아침 햇발이 유난히 빛나고 아름답던 그 날 수천 군중의 선두에서 편편이 퍼득이며 방선문(訪仙門)을 거처 고을로 고을로 행진해 들어오는 태극기─ 이 농민 대중의 선구에 선 최초의 태극기 밑에서 내 고향 수백 동포가 왜(倭)의 총칼에 피를 뿌리고 늘어섰다. 내 이십 수년간 고향 젊은이로서 태극기와 붉은 기를 사수하여, 혹은 넘어지고 쓰러진 이, 혹은 총칼에 몰려서 옥에 갇힌 이 그 수를 헤아릴 길이 없다.
36년의 긴 철쇄(鐵鎖)가 끊어져서 이제 내가 붓과 친숙한지 십수 년 처음으로 엮어보는 이 투쟁기록의 드라마를 나는 서울 앉은 채 쓰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고향의 선배와 선열의 무덤을 찾아보고 그들이 흘린 피의 전적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 누를 길이 바이없으나, 시방 나는 그러한 여유와 시간을 가지지 못한 채 이 희곡에 붓을 든 것이다. 그러나 성천(成川)서 일어난 사실만으로 이 극을 짜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나 내 뜻과 피와 마음이 가는 곳은 의연히 평양서 160리를 격(隔)한 나의 고향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언어나 무대에서 특별한 지방색을 고집할 필요가 없음은 이 운동이 한 지방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도 있는 것이나, 방언이 연기의 진실성을 저해할까 우려함에도 결과된 일이다.~
* 김남천(金南天)(1911~1953) 본명 김효식(金孝植)
소설가, 문학평론가
평남 성천 출생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 호세이대학 수학
카프 동경지부 활동, 발행 동인지 ‘무산자’ 동인
‘조선중앙일보’ 기자 역임
조선문학가동맹 서기장,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월북 작가
대표작 장편소설「대하(大河)」(1939), 「소년행」, 「맥」,「파업조정안(罷業調整案)」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