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의 큰 기백으로 12차례 격전에서 적의 선박 수백 척을 격파하면서도 거의 손실도 없었으니, 이러한 전례가 해전사에 기록이 있겠는가?
난중일기에서 드러나는 그의 기상과 불굴의 의지는 이런 용감함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의 시작은 열악한 조선의 정세뿐만 아니라 이순신에게도 한순간의 거대한 승리였다. 3년간의 협상 등에도 불구하고 무려 7년간의 싸움은 1598년 노량해전으로 마감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은 그가 전쟁 기간 중 오랫동안 기록한 난중일기(乱中日記)》(국보 제76호)를 언론인 설의식에 편역으로 일부분만을 발췌 번역 정리하여 1955년 원제《이순신 수록(手錄) 난중일기초(抄)》를 출간한 것이다. 먼저 내놓았던 저자의《민족의 태양(1951)》후속편으로 볼 수 있다.
전반부는 충무공의 임진년(1952)에 360년 기념을 애도하고 앙망하는 헌사 등과 후반부는 난중일기의 본문 해제와 막하(幕下) 장수들의 이력 등을 소개하였다.
또한, 지난해 미국 군사 전문 매체에서 이순신 '거북선'을 세계 해군 역사상 7대 브랜드 군함 중 하나로 언급한 적도 있다.
내용은 원문에 충실하여 한문은 한글로 바꾸고, 용어와 독특한 어휘 등은 그대로 한자와 혼용 표기하여 설명을 덧붙였다.
<서평>
-본문 중에서
*초2일(임진년)
진시(辰時)(오전 8시경)에 원균은 경상 우수경(慶尙右水境)인 한산도(閑山島)로부터 오직 병선 한 척을 타고 이르렀다. 관하의 병선 73척을 거의 다 수몰시키고 걸망포(傑望浦)에 숨었다가 이제 이곳에 이른 것이다. 막하(幕下) 장수로 뒤따라온 사람들은 크고 작은 배 4척에 남해 현령(南海縣令) 기효근(奇孝謹)과 미조항(彌助項), 첨사(僉使) 김승룡(金勝龍), ~
*8월 30일(계사년)
원균 수사가 와서 그 거느리고 25척 배를 모두 내보내고 겨우 18척의 배를 가지고 영등포로 가기를 독촉하니, 그 정성스런 마음과 행동이 과연 흉하다 하겠다.
*1월 19일(갑오년)
아침에 떠나 당포(唐浦) 외양을 거쳐서 순식간 한산도에 이르다. 사정(射亭)에 좌정하고 여러 장수와 함께 회의하다. 저녁때 원(元) 수사가 오다. 영남 병선의 사격(射格)들이 거의 다 굶어 죽었다 하니 차마 들을 수 없다.
*8월 9일(정유년
일찍 떠나 낙안현(樂安縣)에 이르니 백성들이 5리나 나와서 보인다. 분산하는 이유를 물으니 “적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만 듣고 병사는 미리 겁을 내어 창고에 불을 지르고 도망한 때문이라”고들 모두들 말하였다.
*10월2일(무술년)
묘시(卯時)에 진병하였다. 우리 수군이 선봉으로 나서서 오시(午時)(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싸워 많은 적을 무찔렀다. 사도첨사(蛇渡僉使)와 이청일(李淸一)이 전사 하였다. 사량만호(蛇梁萬戶) 김성옥(金聲玉), 해남 현감(海南縣監) 유형진(柳珩珍), 도 군수(島都守) 선의경(宣義卿), 강진 현감(康津縣監) 송하보(宋何甫) 등이 부상하였다.
<편역 저자 소개>
* 설의식(薛義植)(1900~1954) 호 소오(小悟)
언론인, 평론가
함북 단천 출생
니혼대학 사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부사장, 주일특파원
1931년《신동아》잡지 창간
저서 ‘해방이후, 금단의 자유, 소오문장선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