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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종교사(기독교)

*저본: 朝鮮宗敎史(青柳綱太郎)(朝鮮研究會, 1911)(기독교) 서기 1839년경 중국에 만연한 기독교(基督敎)는 엄중한 국금(國禁)을 깨고 조선의 국경에 들어왔다. 그리고 왕도(王都)의 상하가 주목하는 가운데 엄숙히 포교에 종사했다. 대원군(大院君)의 비(妃)와 같은 이는 먼저 기독교에 투신했다. 조야의 인사들이 귀의하는 자가 수년간 경성(京城) 내외에 10만여 명에 이르렀다. 신앙에 굶주린 국민은 마침내 음식을 가릴 겨를도 없이 한 조각의 빵에 의지한 것이다. 그러나 굶주린 그들, 목마른 서민이 배부르다고 본 것은 잠시뿐이었다. 그들은 무참하게도 그 신부와 함께 3만 중 모두가 한성(漢城)의 시장 거리에서 허리가 잘리거나 때려죽임을 당했다. 이래 기독교의 포교는 일시 좌절을 겪었으나 용감한 선교사는 결..
*저본: 朝鮮宗敎史(青柳綱太郎)(朝鮮研究會, 1911)(기독교)
서기 1839년경 중국에 만연한 기독교(基督敎)는 엄중한 국금(國禁)을 깨고 조선의 국경에 들어왔다. 그리고 왕도(王都)의 상하가 주목하는 가운데 엄숙히 포교에 종사했다. 대원군(大院君)의 비(妃)와 같은 이는 먼저 기독교에 투신했다. 조야의 인사들이 귀의하는 자가 수년간 경성(京城) 내외에 10만여 명에 이르렀다. 신앙에 굶주린 국민은 마침내 음식을 가릴 겨를도 없이 한 조각의 빵에 의지한 것이다. 그러나 굶주린 그들, 목마른 서민이 배부르다고 본 것은 잠시뿐이었다. 그들은 무참하게도 그 신부와 함께 3만 중 모두가 한성(漢城)의 시장 거리에서 허리가 잘리거나 때려죽임을 당했다. 이래 기독교의 포교는 일시 좌절을 겪었으나 용감한 선교사는 결코 위험과 생사를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었다. 수많은 고난을 무릅쓰고 다시 포교에 착수했다.<본문 중에서>
*아오야기 츠나타로(青柳綱太郎)(1877~1932) 남명(南冥)
도쿄전문학교(現 와세다대학) 졸업
1905년 조선 재무고문부 재무관을 거쳐 궁내부에서 「조선왕조실록」 편찬 종사
조선연구회 주재, 1924년 주간 「경성신문」 발행
저서 『조선소요사론』, 『조선통치론』, 『조선문화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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